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녕대군(태종 이방원) (문단 편집) == 극중 묘사 == 작중 양녕대군은 <용의 눈물>을 필두로 그간 다수의 사극 작품들에서 차용해왔던 소위 '왕재가 충분히 있었지만, 권력을 스스로 버린 호탕한 인물'로서의 미화, 왜곡된 면모는 물론 '가족사에 대한 환멸'로 인한 의욕 상실 같은 것이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무능한 주제에 권력욕에 매몰된 모습'''을 보여주며, 피로 얼룩진 가족사에 대해서는 별달리 의식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외에 '''사료에 기록된 여러 부정적인 모습들'''[* 자신을 키워 준 외가에 대한 배신, 동생에 대한 질투, 무단 외출, 상중에 연회, 호색한 등] '''역시 드라마 상에서 빠짐없이 등장한다.''' 다만 양녕이 최후반부의 주역이다 보니, 실제 기록된 막장 행각들이 압축되면서 '''본의 아니게 순화'''되긴 했다.[* 역사상의 기록으로 태종이 양녕대군에게 가장 크게 분노해서 쌍욕에 가까운 거친 언사를 쏟아낸 것은 바로 동복동생인 [[성녕대군]]의 일이다. 병약했던 성녕대군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사경을 헤매자 충녕대군은 어떻게든 어린 동생을 살려보겠다고 어의들과 머리를 맞대며, 필사적으로 의서를 뒤지고 있었는데 양녕대군은 [[인간말종|성녕대군이 사경을 헤매고 끝내 병으로 죽을 때조차 궁중에서 활쏘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훗날 태종이 [[어리]]의 일로 양녕대군을 꾸중할 때 "성녕이 죽었을 때에 궁중에서 활쏘는 놀이를 하였다니 동복동생의 죽음을 당하여 부모가 애통하는 때에 하는 짓이 이와 같다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했는데, 아버지인 태종마저 양녕대군의 만행에 분노가 폭발하다 못해 친아들의 면전에다 대놓고 '''"동생이 죽었을 때 싸돌아다니며 놀기나 하고 네놈이 그러고도 사람이냐"'''라고 쏘아붙인 것이다. 하지만 본 드라마에서는 성녕대군 자체가 등장하지도, 언급도 되지 않기에 양녕대군의 이런 패륜적인 행각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성녕대군의 일은 생략됐지만, 그 때 했던 욕과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29화에서 네 명의 아우를 모두 잃은 [[원경왕후(태종 이방원)|원경왕후 민씨]]가 양녕대군을 찾아가 '''악귀''', '''물귀신'''이라고 비난했으며, 30화에서는 궁에서 내보냈던 어리를 다시 데리고 와서 주색잡기를 부리던 모습을 보고 '''네가 사람이기를 포기했으니, 이제는 널 뭐라 불러야할지 모르겠다.'''며 쏘아붙였다.][* 실제 역사상에서도 대단한 아들 바보였던 태종은 성녕대군이 요절하자, 얼마동안 수라도 들지 않고 조회마저 정지할 정도로 두고두고 슬퍼했다. 오죽하면 훗날 태종이 성녕대군이 살던 집 앞을 지나게 되자, 신하들에게 "나는 진실로 그대들이 날 비웃을 줄 알지만, 도저히 아들 생각이 나 울 것 같아서 안 되겠다"라며 그 앞을 지나가지도 못하고 빙 돌아서 갔다.] 어릴 적에는 이방원&원경왕후 부부가 앞서 세 아들을 여의고 겨우 얻은 아들인 만큼 부모가 양녕을 몹시 애지중지했지만, 본인은 입궁 전에는 외갓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직접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충녕과 비교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원망, 동생에 대한 열등감이 겹쳐진 끝에 양녕은 아버지와 어머니 속을 시커멓게 태우고 있다. '''부왕은 양녕이 왕실의 후계자가 되길 원하는데, 양녕은 끝까지 이방원과 민씨의 아들로 남아 어리광만 부린다.''' 양녕은 가문(家)을 넘어 국가(國)로라는 드라마의 중심 사상과 반대되는 행보를 걷고 있는 것이다. 작중 양녕은 외가에서 너무 오냐오냐하며 기른 탓에, 굉장히 이기적이면서도 줏대가 없다. 왕실의 장자로 반드시 가져야 하는 책임감, 하기 싫은 일도 꿋꿋하게 해나가는 끈기, 듣기 싫은 말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도량이 모자라며 다른 사람은 어찌 되든 자기 편한 길만 찾으려고 한다. 때문에 애민군주는 커녕 자기 주변 사람조차 제대로 아껴주지도 못한다. 오히려 제대로 된 직언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왕이 되면 널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아첨을 일삼는 사람에게만 "내가 왕이 되면 널 잊지 않겠다"라고만 한다. 그에겐 왕이란 그저 편하게 놀고 먹기위한 수단일 뿐인 것이다. 장차 왕이 될 자가 이래도 되냐는 어리의 항변에 왕은 나랏일을 하기에 앞서, 편안해야 하므로 모든 것이 허락된다는 마인드를 드러낸다. 심지어 호색한 기질도 심해서 유부녀까지[* 본처 외에는 혼인관계를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본처 외 소생은 사생아 취급받는 서양과는 다르게, 조선의 일부일처다첩제의 첩은 본처보다 격이 낮지만 정식 혼인관계이다. 서자도 적자보다 서열이 낮고 여러 차별이 있기는 해도 아버지의 자식으로 인정받는다. 곽선의 아들이 [[어리]]를 강제로 데려가려는 양녕과 그 패거리들을 양녕이 세자의 권위를 내세우며 협박할 때까지, 필사적으로 말린 이유도 비록 신분은 낮을지언정 엄연히 자기 아버지의 부인을 데려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사로만 언급된 초궁장도 상왕이자 백부인 정종의 첩이나 다름없는 기생이었다.] 마음대로 겁탈하는 등, 그야말로 [[충혜왕]]의 후배이자 [[연산군]]의 대선배뻘.[* 실록에 기록된 내용만 봐도 양녕이 왕위에 올랐으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자신이 공부를 게을리한 죄로 내관이 장 30대를 맞고 쓰러졌을 때, 양녕은 내관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내관들이 얻어 맞는 걸 불편해 했으나, 문제는 그 다음 '''[[현실도피|도피]]'''를 한다는 것. 내관들이 얻어 맞는걸 끝까지 보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는데, 걱정을 안 하는 것도 이의 일환일 수도 있다. 이외에도 양녕은 수많은 도피행위를 저지르는데 자신이 마음에 상처를 남긴 어머니 원경왕후의 곁에 계속 있어주며 위로해주어야 한다는 충녕의 조언도 어머니와 사이가 거북하다는 이유로 무시하였고[* 민씨 가문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원경왕후는 태종을 대놓고 저주하는 상태까지 왔는데도, 아들에 대한 원망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사람이였다. 비록 아들이 친가의 숙청에 한몫 했어도, 어머니에게는 여전히 아들이 최고였던 것. 충녕의 말대로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 술집에 가는 두 번의 장면 역시 양녕이 각각 충녕과 비교당한 후와 대비의 상중이라 처신을 조용히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이후라는 걸 보면[* 더불어 구종수와의 대담을 통해 모범생인 척하며, 얻은 스트레스도 원인임을 알 수 있다.] 스트레스 받는 상황을 도피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태종에게 대들며 식음을 전폐할 때 그가 내건 조건, 그리고 태종이 '''들어''' 준 건 오로지 '''숙위병 해제''' 뿐이었다. 나머지는 양녕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도 태종이 '''해''' 준 것 뿐. 그러니까 이 양녕에게 인간관계 이상으로 우선시 되는 건 술집 가는 것, 즉 도피행위인 것이다. 그걸 못하게 되니까 꼭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 두려워하는 자기 아버지에게 대든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대들자 아버지가 다 들어준 걸 경험했는데도, 이후에 아버지의 의사를 거부해서 목적을 이룰 생각은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때 아버지에게 대든 건, 궁지에 몰려 이판사판으로 벌인 요행이었던 것이다.[* 반면 충녕은 어머니에 대해(외삼촌 이야기는 자제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요소임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이다.) 너무 가혹한 처지라고 조리 있게 대들어서 태종의 눈에 든다.] 그 궁지가 고작 술집 못 가는 것이라는 건 여러모로 한숨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요소다. 자신이 겁탈한 어리에게 '너와 같이 있으면 생각할 필요가 없어 좋다'라고 발언하면서 그녀도 도피의 대상이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문제는 하필 세자 자리와 왕위계승을 두고 충녕과 대립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상황에 한 번 돌려 보냈던 어리를 다시 데려 왔다는 점이다. 이 행위는 결국 그에게는 야심, 생명보다도 도피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된다. 야심은 어차피 범인의 그릇이라 소인배라고 쳐도 왕위계승의 패자에겐 죽음 밖에 없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안다고, 큰 소리를 쳐놓고도 저러는 건 나라 운영은 커녕 자기 앞가림조차 할 수 없다고 광고하는 꼴이다. 줏대가 없다는 평가를 이야기 하자면, 양녕은 어머니 편을 드는가 싶더니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줄 사람은 아버지라는걸 깨닫자 마자 바로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배신한다.[* 외삼촌들의 죽음이 결정난 후의 반응을 보면 그리 깊이 생각한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니 편전에 든 후 잠시 침묵했던 걸 보면 어쩌면 아버지 앞에 선 그 순간 충동적으로 결정내린 것일 수도 있다. 자기가 한 말이 두 사람의 생사를 결정한다는 걸 이해나 하고 있었던 건지도 의문.] 묘사를 보면 산위에서 내려다 본 넓은 강산과 왕가의 행렬 좌우로 엎드려 절하는 백성들을 보고 그 권세의 쾌감에 취한 모습이다. 태종이 강조한 백성과 강산에 대한 책임감이 아닌 "나중에 아버지가 죽어서 내가 이 나라의 국왕이 되면, 저 넓은 강산들이 다 내 것이 되고 나는 왕으로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에 아버지 편으로 돌아선 것. 하다못해 진짜 부왕 눈에 들기 위해 열심히 하기라도 한다면 모르겠는데 의지박약이라 갑질이나 할 줄 알고, 아첨꾼들이나 선호하고, 황희처럼 옆에서 붙잡아 주는 사람들 말은 들으려고 하질 않는다. 공부를 게을리하는 자신을 책망하는 부왕에게 글공부는 외우지 않고 가슴에 새기는 거라고 뻗대었지만 막상 시험해보니 충녕은 누구의 도움없이 스스로 경전 구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한 반면, 양녕은 표면적인 뜻을 외우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나마 약간이라도 심화과정으로 넘어가면[* '''군자화이부동 소이동이불화'''] 겉으로 외우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정안왕후의 상중에 기생집을 가 술을 마신 것은 양녕의 인물됨을 극명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정종은 태종과 양녕 부자를 중재해 서로 화해하도록 일부러 자리를 마련해줬고, 덕분에 한동안 부자 사이는 괜찮아졌다. 그런 큰아버지가 상처했으며 민간이라도 가서 위로라도 해드리거나 최소한 갖던 술자리도 자중하는 게 유교 사회 조선에서 사람된 도리다. 게다가 왕실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매우 개방적인 현대 유럽 왕실이라도 마찬가지인데 이들도 왕실어른을 비롯한 구성원이 상중일때는 왕위 후계자든 왕실 구성원이든 양녕처럼 클럽 같은 곳에 가서 파티나 술잔치를 벌이면 매우 큰 실례이다. 이런 도리적인 부분이 아니라 실리로 계산해도 아내를 잃고 슬픔에 빠진 정종을 맏조카이자, 세자인 양녕이 위로한다면 정종의 인품상 진심으로 고마워할 것이다. 그리고 상왕 정종은 금상 태종이 조선에서 유일하게 한 수 접어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양녕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면 소소한 비행 정도는 큰 벌 받지 않게 도와줄 수 있는 든든한 우군이 될 수 있다. 하다 못해 가만 있다가 초상이 끝나고 술을 마시러 나가기만 했어도 답답해서 그랬다라고 핑계댈 수나 있다. 하지만 그걸 못 참고 기어코 큰어머니의 상중에 기생집에 출입한 것도 모자라서 궁에 기생을 데려오기까지 했으니, 태종은 물론이고 호탕한 성품을 자랑하지만 한번 폭발하면 성미가 불같은 정종의 눈밖에도 날 것이다.[* 정작 정종은 가문(家)을 넘어 국가(國)로라는 드라마의 중심 사상과 반대되는 행보를 긍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본의 아니게 떠맡은 왕위에도 나름 책임감 있게 해보려고 했고, 용상을 정안군에게 물려준 다음에도 정치 문제는 일절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가족 관련 문제는 태종을 타이르고 태조와 태종의 화해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양녕은 자신을 도와준 큰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지킬 인격도, 욕망을 참을 자제력도 부족하며 처세를 할만한 잔머리 조차 없다는 것이다. 급기야 29화에서 정종을 모시며 사실상 그의 첩이였던 기생 초궁장과 관계를 맺으면서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절대 용납되지 않을 패륜을 저지르고, 이걸로도 모자라 비록 첩이라지만 엄연한 유부녀였던 어리를 세자라는 권위를 내세워 강제로 납치하여 겁탈까지 하는 등,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어버린다. 이런 개막장인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준 탓에 가족을 중요시 여기는 충녕대군 역시 '''"세자 저하는 절대로 왕이 되어선 안 됩니다!"'''라며, 대놓고 양녕을 제치고 세자 자리를 얻겠다며 본격적으로 적대하는 계기까지 마련한다.[* 게다가 작중에서 나오듯 양녕대군에게 '''"형이 세자 역할을 좀 똑바로 했으면 내가 이러지도 않는다."'''라고 면박을 날렸는데, 그 말대로 양녕대군이 세자로서의 무능함만을 보여준 탓에 줄곧 인내했던 충녕이 세자 자리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며 양녕의 적이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양녕이 지닌 세자라는 직위에 대한 열등감이 있어도 그의 비행을 지적하되 꾹 참고 큰형에 대한 예의를 지키던 충녕마저 당시 시대상, 세자에 대한 강상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는 걸 뻔히 아는데도 이런 직설적인 폭언을 내던질 정도니 양녕에 대한 충녕의 분노와 실망, 경멸감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알 수 있다.[* 실록에서도 세종은 자신을 추켜세우며 왕이 되보는 게 어떻냐는 신하의 태도에 헛기침으로 주의를 주되 부정하지 않으며 내심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지 않음을 보여줬지만, 가족을 소중히 여겨 양녕대군을 숙청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보호했지만 결국 정적 관계가 되기도 했고 누구보다 양녕대군의 일탈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다.] 27회, 28회에서 양녕이 무언가 결정할 때는 세트의 배경이 불그스름하다. 꼭 불길함을 강조하듯이. 또 하나 문제는 주변 환경이 이 인간을 더욱 몰아 세운다는 것. 이방원은 세자를 차기 왕재로 만들기 위해 엄격한 교육을 시켰으며, 양녕에게 아버지로서 인간미를 보일 때마다 뭔가 일이 하나씩 터져서 상황을 악화시킨다. 충녕대군의 총명함은 수도 없이 비교 대상이 되어 그의 열등감을 자극하고, 이제는 [[왕|자신의 소유물이 될 것이라 여겼던 당연한 걸]] 그 총명한 충녕이 대놓고 노리기 시작한다. 걸핏하면 도피나 일삼는 양녕의 작은 그릇으로는 이 상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유지하려 하니, 양녕 자체가 앞뒤 가리지 않는 폭탄이 되어 주변에 피해를 주는 것이다. 환경이 양녕의 인간됨을 망가뜨린 결정적 요소임을 25회, 26회의 어린 양녕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때도 세자란 중책에 적응못하는 면모를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내용물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아이나 다름없었다. 억압받는 어머니를 공감해주고, 외삼촌들을 위해 싫은 짓도 불사한다. 결국 궁은 양녕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고, 맞지 않은 자리에 계속 머문 결과 기본적인 인간됨까지 망가져 버린 것이다. 때문인지 32회에서 평범한 왕자가 된 양녕은 정말 차분하며, 문제를 일으킨 스스로를 자책하고 동생을 인정해주는 인간미를 되찾은 면모를 보인다.[* 물론 이는 드라마상의 창작으로 실제로 양녕대군은 폐세자된 이후에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사고를 쳐대는 왕실의 골칫 덩어리였다.] 그나마 여기까지도 이방석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하게 남아 있는 조선왕실의 상황을 감안하면 어떻게든 버텨 볼 소지가 있었다. 문제는 이런 수많은 비행과 그로 인해 닥쳐오는 위기마다 양녕이 전가의 보도마냥 꺼내드는 카드가 '''"내가 보위에 오르면"'''이라는 협박이라는 것이다. 이게 내관이나 곽선의 아들 같이 힘 없는 이들에게는 당장이라도 먹히는데, [[류정현]] 같은 대신급이나 [[충녕대군]] 같은 왕위계승권자에게까지 남발해대니 안 그래도 남아날 리가 없는 세자의 편은 손 쓸 도리가 없이 충녕 쪽으로 이탈하고 만다. 대신들 입장에서는 왕명만 전달, 집행하는데도 보위에 오르면 두고보자는 식으로 나오니 생존을 위해서라도 쟁국본에 가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반대로 충녕은 "자신이 끝까지 형을 보호할 것"이라고 공언함으로써 쟁국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골육상쟁에 대한 우려를 적극적으로 차단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적장자승계가 이뤄지면 피바람이 불고, 국본이 교체되면 오히려 왕실이 안정될 기가 막힌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태종이 충녕에게 제시한 조건이 '조정에 피바람이나 분란을 만들지 말고' 세자 자리를 쟁취하는 것이었고, 이는 대신들을 중립적 방관자 포지션으로만 묶어두면 사실상 달성이 불가능했음에도 스스로 세자 자리를 갖다 바친 꼴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자신을 변명할때 "자신은 태어나보니 장자였고, 철들으니 세자라는걸 인식했다" 라고 주장하는데 그 역시도 그저 변명을 위한 변명일 뿐이다. 어렸을때부터 자신이 장자라는 걸 유난히 드러내기를 좋아한 모습이 많이 묘사되었고, 대놓고 충녕에게 함부로 자신의 자리를 넘보지 말라는 것을 여러번 암시했다. 그런데 책임을 질 시기가 다가오자 그 책임은 지기를 원하지 않고 남 탓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양녕이다. 정 자신이 세자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면 자신의 백부인 진안군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에서 사라지거나, 자신의 동생처럼 전혀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것도 아닌 권력과 지위는 원하면서 책임을 지기는 싫어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이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양녕은 행적이나 개인적 능력은 물론 성품마저도 그야말로 소인배다. 현대로 치면 전형적인 '''오만방자한 망나니 재벌 3세.''' 아버지가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고 피비린내나는 정쟁으로 쟁취한 왕위에 대해 어떠한 성찰도 없이 '당연히 아버지의 맏이인 자기 것'이라고 여길 뿐이고, 마치 '무엇이든 해도 되는' 자신만의 특권처럼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 들 때 항상 '내가 보위에 오르면'이라는 말을 하며 압박한다. 결국 충녕대군에게 그 말 그대로 돌려받는다.] '내가 이만큼 열심히 하는데 이 정도는 누려도 되는 것 아니냐'[* 사실 노력한 건 별로 없는 반면 누리는 향락은 정도 이상으로 방종하다.]라는 변명으로 자신의 패악질을 정당화하는 자기위주의 유아적 인간상. 이제까지 사극에서 양녕이 거물로 묘사되었던 점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인데, 본 작에서 양녕의 언행들은 극의 각색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긴 하나 거의 대부분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외숙부들의 죽음에 적극 동조한 것이나, 어리를 겁탈하여 아버지에게 책망을 받은 후 아버지에게 '아버지도 첩이 있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느냐'라고 반항하는 것이나, 충녕에게 '네가 아버지에게 고한 거냐'라고 따지며 양보는커녕 세자 자리를 놓지 않으려고 기싸움을 한 것들은 '''모두 조선왕조실록에 실제로 기록되어 있는 것들이다.'''] 실록에 기록된 망나니 양녕대군을 '''일체의 미화없이 그대로 재현했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의 양녕 묘사'''는 사극 역사상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태까지 사극만 보고 양녕대군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시청자들이 본 작에서 보여진 역사 속 양녕의 진면목을 보고, 심지어 그 만행이 '''실록의 기록에 비하면 순화한 것을 알고''' '정말 양녕이 저랬다고?'라고 놀라워할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